할아버지를 떠나보내며(祖父喪)

유경주 / 국어교육·19

 


입속에 먼지처럼 쌓였을 세월의 무게로
노인은 차가운 안치대에 몸을 뉘었다

달궈진 슬레이트 지붕 매미 소리 듣고 있을 때
빼빼한 몸 안에 뜨거운 총알 지닌 사내 하나
끈적이는 흙길 무한궤도의 상흔이 아직 선명한데
빽빽하게 그를 둘러싼 뙤약볕 아래
벼를 닮아 젊은 농부의 허리도 착실하게 굽어갔다

핏기 없던 얼굴 품안의 새벽이 익을수록
온통 그을려 엉킨 주름
침묵의 울음소리는 각기 다른 옹알이로
가을바람 타듯 철길 따라 떠났다가
그를 닮은 얼굴로 철새처럼 돌아왔을 때
손금 사이 핀 굳은살은 농기구
놓을 겨를 없던 삶을 증언하듯
머리맡의 식기는 싸늘했더랬다

등 덥히는 노인 앞에서 바닥에 뺨을 문지르다가
처진 눈이 섬뜩해 그만 울음보 터진 나를 보고
그의 목구멍을 간질이는 건 어떤 시절이었나
가지런한 백발과 촘촘하게 박힌 검버섯 여전한데
쫘악 펼친 몸은 부러진 자리처럼 어색하다

사진첩은 망국의 초라한 사전
겹겹이 쌓인 얼굴 속
그의 표정 하나하나 지워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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